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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노트

DAY 2. 붉은 등, 달빛 아래 찻집

by 카타리나39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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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공항에 선 서하는 순간 자신이 버려진듯한 기분이 떠올랐다.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누구와 함께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마냥 서 있기만 하던 어느 날의 자신이 눈앞에 보이는 거 같다. 그 어렸던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꼭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끊임없이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어딜 가?”
“여행.”
“그러니까 어디로 가냐고?”
“몰라.”

남편은 그런 자신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글쎄, 무슨 생각일까?

국내의 어딘가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딘지도 잘 모르는 지역을 고르려고 할때마다 남편의 카드 내역서에 있던 그 지역의 맛집이 떠올랐다. 그래서 제주도도 안가본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목적지를 밝히지는 않는다.

“그냥, 생각 좀 정리하고 싶어서.”
“하, 생각? 뭐 또 쓸데없는 생각하려는거 아니지? 어디로 가는지 알려줘. 거기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푹 쉬고 와.”

배려심 가득한 그의 말. 예전이라면 행복했을테지. 그의 자상함이. 하지만 서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데려다 준다잖아.”

그의 목소리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낮에 갈 거야. 당신 회사에 있어야하잖아.”
“낮에? 그럼 좀 힘들겠네.”

큭, 자신도 모르게 삐져나온 소리.
그렇지. 당신은 나를 위해선 시간을 빼지 못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출근했다고 한 날 찍힌 당신의 카드 내역서는 왜 먼곳이었을까?

생각할수록 자신의 바보같음만 떠올려지는 과거. 서하는 고개를 흔들며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남편이 출근을 한 후에 혼자서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고 지금 이렇게 낯선 공항에 서 있다.

정신을 차린 서하는 주변을 둘러보다 택시 승강장 표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정한 장소였기에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다. 아니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지.

택시를 타고 도착한 호텔은 꽤 괜찮은 모습이었다.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는 하얀 침대와 잘 정돈되어 있는 물건들. 항상 자신이 남편을 위해 정리해왔던 집의 모습과 겹쳐졌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서하는 집안일도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쫌 그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서하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렇게 떠나와서까지 왜 자꾸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만 따라오는지 알수가 없다.
서하는 캐리어를 풀 생각도 않고 다시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자신의 목적지를 향했다. 지리도 모르고, 언어도 안되는 지금 그나마 택시가 서하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돈을 아끼려고 항상 대중교통만을 고집했던 예전의 서하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지우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온천마을을 닮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서하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감명 깊게 본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판타지 세계로 가버리는 주인공, 그 안에서의 삶 그리고 환상처럼 만난 하쿠. 그 안에서 서하는 무엇이 자신을 이곳까지 올 정도로 자신을 끌었는지 알 수 없다. 힘들어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을 구원해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랐던 걸까? 어느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그 영화의 배경이라는 이 마을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지우펀은 서하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 사람들로 북적였고, 영화 속 몽환적인 풍경과는 다른 현실의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끼 낀 지붕과 덩굴이 얽힌 벽이 영화 속 온천 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하쿠는 없지.’

지우펀의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길을 걸으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서하는 조금 멀리에 있음에도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붉은 등을 보며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과는 조금 다른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복작이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니 여유로운 느낌이 든다. 이미 문을 닫는 가게들과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가게들을 보던 서하는 자신을 이쪽 길로 오게 했던 등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멀었나?’

금방 닿을 수 있는 거리인줄 알았는데 등은 조금 더 떨어져 있었다. 주변엔 여전히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쪽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생각과는 다르게 곧은 길이 아닌 굽어져 있는 골목을 몇 개 지나쳐야 했다. 그렇게 별 생각없이 걷던 서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달이 구름에 가려져 조금 전보다 어두워진 주변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뭐지? 여긴 왜 아무도 없는거지?’

갑자기 무서움이 든 서하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돌아갈 수 있나? 유명한 길치인 서하는 무슨 용기에 자신이 이 길로 접어들었는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냥 왔던 길이니까 그걸 따라 다시 갈까?’

이게 마땅한 생각이었다. 왔던 길도 다시 가면 헤매는 서아로써는 그래도 그나마 길을 잃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걷다 보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나올거라는 생각에 걸음을 돌리려던 서하는 다시 한번 자신을 이끌었던 붉은 등을 바라봤다. 조금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크게 심호흡을 한 서하는 왔던 길이 아닌 가려던 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괜히 이쪽으로 왔어!라는 후회를 수십번쯤 하고, 긴장으로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을때쯤에야 서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구름속에 가려진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의 비춰주기 시작했다.

여전히 붉은 등은 빛나고 있었지만 가까이 와서 본 등은 지우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등과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어째서 이것만 그리 붉게 보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끝, 자신을 불러온 그 등이 메달려 있는 가게의 문이 보였다. 창문으로는 가게안이 자세히 들여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빛을 보니 장사를 하고 있는것은 맞는 듯 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다는 생각에 괜히 여기까지 온건가 싶어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냥 돌아가기가 뭐해서 서하는 가게 문을 살짝 밀어봤다.

작은 힘에도 문이 열리며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불빛에 이상하게 안도감이 든 서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지금까지 지우펀을 거닐며 들었던 소음들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고요함이 서하를 맞았다.

“어서오세요."
“어? 한국분이세요?”

익숙하게 들려온 한국말. 반가움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하지만 자신을 맞은 찻집 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류 때문에 이곳에도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더니 그런 모양이다. 서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둘러봤다. 밖에선 자세히 보이지 않던 찻집의 실내는 텅비어 있었다.

“이곳에...”

아무곳에나 앉으려고 하는 서하를 주인은 카운터옆 바형식의 자리에 앉으라고 안내했다. 그곳에 앉으면 이 사람과 뭔 말이라도 해야할거 같아 거절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사람에게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결국 주인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저기...”

메뉴라도 달라고 해야하는데 자신을 자리에 안내한 후 주방으로 짐작되는 안쪽으로 주인은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듯 하다는 생각을 할 때쯤 자신의 다리를 건드리는 무언가에 깜짝 놀란 서하는 벌떡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

‘고양이?’

온통 까만색인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리로 가줄래?”

알아들을거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말을 한다. 고양이를 멀리서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가까이오면 무서운 서하다. 고양이의 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무섭다. 슬쩍 움직이려던 서하의 시선이 고양이의 눈과 마주쳤고 그 고양이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잠시 발걸음이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속엔 마치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누군가에 대한 아련함이 보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도 서하는 슬쩍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면서 다시 나가야할까 고민을 한다.

“차 드세요.”

어느새 나왔는지 자신의 앞에 차 한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라벤다?”
“맞아요. 드세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속의 물이 라벤다에 의해 옅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주문하지도 않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라벤더 차가 서하 앞에 놓여 있었다. 마치 자신을 잘 알고 기다려왔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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