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러 온 여자는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홀로 앉아 있다. J에게 커피나 마시러 오라고 문자를 보내려다 자신의 손에 들린 차키를 본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커피를 마시러 오면서도 들고 온 모양이다.
그 깨달음! 깨달음이라 해야 할까? 여자는 자신 손안에 있는 이제는 평범한 작은 인형이 매달려있는 차키를 내려다본다. 깨달음 이였건 뭐건 간에 그 생각이 든 순간 여자는 스스로의 생각에 경악했다. 자신이 그 정도의 인간일거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차키에 매달고 다니던 유리병을 떼어내 버리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후론 가방 안에 고이 모셔두고만 다녔다. 하지만…….
'언제든 죽일 수 있잖아. 절대 네가 한줄 모를 텐데'
끊임없는 유혹의 소리가 들려왔다. 애를 쓰며 그 생각을 밀어내려했지만 순간순간 유혹의 시간이 찾아 들었었다. 죽일 수 있다는 말이 더 유혹적인지 아니면 절대 모를 거라는 말이 더 자신을 흔들리게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래 둘 다였겠지.
"뭐해요? 커피 안 마셔요?"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를 현실로 불러들인 건 남자의 목소리다. 이미 커피를 뽑아 자신에게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요?"
그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며 여자는 그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휴게실 안에는 남자와 여자 둘뿐이다. 여자의 미소를 보며 남자도 미소를 짓는다. 여자는 그 미소가 좋다.
"오늘 영화 보러 갈래요?"
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자는 연애를 한다.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좋다했던 남자와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그 여직원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만나던 남자와 헤어지고, 힘겨운 일이 겹쳐 마음이 약해졌던 까닭도 있지만 분명 그 여직원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말하기는 어려웠다.
남자는 생각보다 더 자상했다. 이 사람이라면 조금은 기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가 전에 거기에서 만나요 그럼"
남자가 먼저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여자는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신다. 아직은 비밀연애를 하는 그들이다. 이제 시작이니 대놓고 말하기도 좀 쑥스러워 숨기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은 친한 J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조만간 얘기를 할 생각이긴 하다.
일어나기 전 여자는 잠시 눈을 감는다.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남은 오후도 힘내보자 스스로 다짐을 하는 중이다. 휴게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여자가 눈을 떴다. 그 시야 안에 잡힌 것은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그 여직원이다. 왜 하필 또 이 여자와 마주친 것인지 인상이 써지려는 것을 눌러 참았다.
"커피 마시려고? 한잔 뽑아줄까?"
여자는 일어서며 친절하게, 그래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어떻든 친절하게 의향을 물었다. 자신을 보는 그 여직원의 굳었던 표정이 더 굳어지는 것이 보임에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얼굴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보이는 여유까지 부린다. 이래서 요즘 들어 자신의 얼굴이 묘하게 편안해 보인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죠?"
사귀는거야?라고 말하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풋! 하고 웃음이 나온다. 몇 번의 부딪침으로 그나마 조금은 달라지고 있는 건가?
우스운 건 '나는 언제든 너를 죽일 수 있어' 라는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마음먹으면 죽어버릴수 있어 에서 그 죽는다는 주체가 내가 아닌 너로 바뀐 순간부터 여자에게 알 수 없는 여유가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여자는 한때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힘들었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J가 너 요 근래 더 편안해보이는거 알아? 뭔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거야? 하고 물을 정도로 여자는 변했다.
어찌되었든 그 여직원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도 하찮게 느껴진다. 한때는 너무 힘들어서 사직서를 쓸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생각 하나가 바뀌었다고 여직원의 행동이 별 타격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한결 상대하기가 쉬워졌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 여직원뿐 아니라 모든 일에 조금씩 더 여유가 생겼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상관할일이 아닐 텐데?"
"내..내가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안다고 해야 할까?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거라고 미리 짐작부터 하는 것은 뭔지 모르겠다. 아, 물론 알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게 왜 나를 그렇게 괴롭혔니?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머 그랬어? 그런데 두 사람이 사귄 것도 아닌데…….문제가 되니?"
아무렇지 않게 여자는 모른 척을 한다. 그 말에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지만 어깨한번 으쓱할 뿐 여자는 아무런 마음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대답을 듣지도 않고 여자는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왠지 모를 통쾌함. 흥, 별것도 아닌 것이 까불기는. 잠시 휴게실을 돌아본 여자는 경쾌한 발걸음을 내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인생이 요즘 같다면 그래도 살만하다 생각하는 중이다. 돈이야 열심히 벌면 되는 거니까.
"걔 오늘 출근하더라. 아까 마주쳤어"
"그래? 사무실엔 아직 안 들어왔는데……."
그것은 휴게실에서 그 여직원과 부딪치고 정확하게 일주일만의 일이다. 그러니까 그날 이후 갑자기 그 여직원은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그만뒀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파서 휴가를 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아프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하지만 이번처럼 길게는 처음이라 진짠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다. 빽이 좋은 사람은 이래서 좋다. 누구는 아파도 눈치를 봐야하는데.
"출근길에 봤거든. 어디 들렸다오나? 여튼 걔도 대단해.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더라."
"아픈 게 괜찮아진 모양이지 뭐"
일주일만의 출근임에도 아무렇지 않게라는 단어가 붙을 정도라니 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듯하다. 사실 살짝 걱정을 하긴 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한말 때문일까? 혹은 그 정도로 그 남자를 좋아했나? 하는 생각이 들며 조금 걱정이 되던 차였다. 모순이다. 그 여직원을 걱정하는 이 마음이. 모순이란 걸 아는데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보인다니 자존심만 좀 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정말 아팠거나…….
"근데 걔 뭔가 좀 이상해"
"이..상하다니?"
"이상하다기보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해야 하나."
이상하다니? 분위기가 달라져?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진짜 아팠던 건가.
"왠지...그래 너......."
"안녕하세요!"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소리와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에 J의 말이 섞여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뭐지? 여자는 J의 얼굴을 바라본다. 거봐!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정말 믿을 수 없지만 분명 그 여직원이다. 한 번도 저런 인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선배님, 저 때문에 힘드셨죠? 제가 커피 한잔 살게요."
여자에게 다가와서는 선배님이란 호칭을 쓰는 이 낯선 여자가 정말 그 싸가지없던 여직원이란 말인가? 여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 번 J를 돌아본다.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J의 뒷모습을 보니 자신의 눈이 맞긴 맞는가보다.
"제가 살게요. 가세요."
여자의 팔을 잡아끌듯이 여직원은 휴게실로 향한다. 그리곤 앉아있으라며 자신이 직접 커피까지 뽑는 황당한, 정말 오늘 해가 어느 쪽에서 떴던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할만한 일을 하고 있다. 설마 아팠다더니 진짜 아파서 인성 개조를 하는 수술이라도 받은 것일까?
"지금까지 죄송했어요! 앞으로 잘하겠다는 뜻으로 사는 거니까 드세요."
여직원이 내민 커피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이좋게 지내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뭔가가 찜찜하다. 여자는 그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안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온 거라더니 그런 건가? 여전히 서 있는 여직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너무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여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왠지, 그래 너처럼 뭔가 편안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여자는 순간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아까의 소란스러움 속에 J는 분명 그리 말했다. 굉장히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더라고. 얼마 전부터 너한테서 보이는 모습이더라고.
여자는 멈춘 손을 천천히 내리곤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직원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준다. 아까와 달리 여직원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커피 잔을 입에 대고 여자를 바라바고 서 있었다. 그러더니 시선이 마주치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분명 그 미소는 좀 전에 보여줬던 미소와는 다르다. 다르게 느껴진 것이 아니라 분명 달랐다.
그제야 여자는 그 여직원의 손이 시야로 들어왔다. 손아래서 흔들리고 있는 키링. 자신의 가방 안에 있는 그것과 너무도 닮은 그 작은 유리병에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경악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봤지만 그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좀 전의 묘한 미소를 지우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는 먼저 휴게실을 빠져 나간다.
여자의 커피 잔이 손에서 떨어지면서 따뜻한 커피가 바닥과 자신의 구두에 얼룩을 남기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닫히는 휴게실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휴게실 창으로 환한 햇살이 따뜻하게 비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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