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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이미지난이야기

12. 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by 카타리나39 2010.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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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쓸쓸한당신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완서 (창작과비평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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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책의 제목에서 풍기는 외로움의 느낌은 무엇이였을까? 깨끗한 표지에 덜렁 써있는 책 표지에서의 느낌도 그러했다. 혼자있어 쓸쓸한것이 아닌 나이듦의 쓸쓸함..

박완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을정도로 꽤 유명한 작가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본적은 없었다. 아니 혹시나 또 읽었었는지도 모른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그의 소설은 제목만 들어본것인지 내가 읽었던 적이 있는것인지 알수가 없다. 혹은 누군가에 의해 그저 줄거리를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꽤 유명한 작품들의 경우 그런 경험이 꽤 많다. 분명 나도 내용을 다 알고 있어 읽은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읽은것이 아니라 들어서 알고 있던 경우들...

여기 수록된 단편들은 젊은이들 보기엔 무슨 맛으로 살까 싶은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이다.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그래주고 싶어 쓴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게 강변이 아니라 내가 아직은 사는 것을 맛있어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난 소리 같아서 대견할 뿐 아니라 고맙기까지하다 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늙은이들은 무슨 맛으로 살까?라는 생각을 지금껏 해본적이 없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무얼까. 그저 연륜이 좀더 쌓여 세상살이 경험들이 더 늘어날뿐...나이가 들고 안들고 살아가는 것은 똑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서문에 밝힌 저 말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아홉개의 단편으로 이뤄진 이 책의 첫번째 글은 마른꽃이란 제목이 달려있다. 조카의 결혼식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에서 만난 남자와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만남의 시간이 길어지자 자식들 사이에서 둘이 합치는것이 어떠냐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그녀는...

지금 조박사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그게 없었다. 연애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다. 정서로 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했다. 나는 그와 그럴듯한 겉멋을 부려본 데 지나지 않았나보다.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였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그런 메마른듯한 시선이 싫었다. 나이가 들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에 잠깐 마음이 철렁했다. 감성이 사라지고 이성만이 자리잡아버리는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조차 들었다.

나이를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 순간부터 책임감과 갖가지 구속이 사람을 지배한다. 어쩔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만 하고, 그렇게 사는것이 옳다 느껴지는 그 순간을 넘기면 어른은 노인이 된다. 그럼 과연 노인이 된 순간부터는 모든 구속을 벗고 자유로울수 있을까? 아니 어린아이였을때부터 진정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저 노인이 되면서 조금 덜 남의 눈치를 보게 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 살아온 연륜만큼 그냥 인사치레 내뱉은 말들속에 숨어있는 참뜻을 쉬이 읽어낼수 있게 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이 그렇게 삭막하게 느껴졌던것일까? 인사치레 속에 감춰진 말과 다른 속뜻을 그저 웃음으로 넘겨줄수 있는 여유가 모두에게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책의 제목이기도 한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보면 별거중인 아내와 남편의 얘기가 나온다. 그들이 자식들의 졸업식이나 혹은 결혼식에 잠깐씩 만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 안에서 아내가 느끼는 감정들...추레하게 늙어가는 남편의 모습이 짜증스럽기만한 아내, 그런데 어째서 아내는 그렇게도 남편을 싫어하게 되었는지가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았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남편과 그 남편에게 불만만 가득한 아내의 모습으로 비춰져서일까 읽는 내내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내를 보는것이 아닌 아내의 시선에 잡힌 남편을 보면 그 쓸쓸함이 눈에 들어온다. 평생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살아온 노년의 가장이란 그런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곤 한다. 내 아버지의 등에서 간혹 난 그런 외로움과 쓸쓸함을 읽어내곤 하지만 애써 모른척 외면해 버리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나이듦으 피해갈수는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외모를 가꾼다해도 여전히 나이는 먹어가고 모두가 노인이 되어간다. 그렇게 노인이 되었다해서 그 순간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어 질 것이고 그 삶은 끝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냐는 역시 본인에게 달린 문제가 아닐까 한다.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그 시를 외우는것도 아니다. 그저 전체적인 내용이 기억에 남아있어 가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곤 했다.  시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그는 젊었을때 열심히 일을 했고 60세쯤 당당히 은퇴를 했다. 하지만 95세 생일에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60년 생은 자랑스러웠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후회였다고....

그는 퇴직후의 삶을 인생의 덤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그렇게 30년을 살았다. 자신의 삶의 3분의 1일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버린 것이다. 스스로가 늙었다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탓이였다.

그는 95세에 어학공부를 시작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한 10년쯤 더지나 왜 95세인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가끔씩 이 시가 떠오를때가 있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무슨 맛으로 살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것은 결국 나이가 든 노인들의 행동에서 보여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저 남은 인생은 덤이니까 죽을날만 기다린다고 생각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이기에 아마도 젊은이들은 그리 생각하게 된것은 아닐까?

나는 더 나이가 들어서도 내 삶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듦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언제나 지나고나서야 그 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그 나이가 결코 늦은 나이는 아니였음을 깨닫게 되는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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